[이동순의 가요이야기] 30년대 홍도, 이 시대 오빠들도 울린다

'홍도야 우지마라' 와 가수 김영춘

사랑을 팔고사는 꽃바람 속에
너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내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 주는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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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야 울지마라 노래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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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계 여성 삶 그린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삽입 노래로 인기
기생 집단관람 등 연일 초만원 '눈물바다'…시대초월 대중감성 자극
데뷔시절의 가수 김영춘.
데뷔시절의 가수 김영춘.
다정한 벗들끼리 어울려 술판이 무르익는 밤이면 어김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 날 부르는 이런저런 단골 곡목들이 많이 있지만 유독 이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이상야릇하게도 옛 학창시절의 교가를 합창하듯 자못 결연한 표정이 되어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구성지게 불러 젖히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세월은 참 많이도 흘러갔습니다. 어떤 익살스러운 친구는 '홍도야 떨지 마라 오바가 있다'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면 또 불씨가 살아나듯 분위기가 새로 살아나서 '홍도야 울덜 말아라! 오빠가 있다'라며 큰소리로 흥겨운 고갯짓을 해대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 친구들 모두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힘들고 가파른 삶의 고갯길에서 새삼 그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추억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 제목은 모르는 이 없지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나 작사, 작곡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던 무렵의 배경과 사연을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1938년 서울 동양극장에서는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 박진 연출, 차홍녀·황철 주연)가 공연되었습니다. 이 극장 소속의 전속극단이었던 청춘좌(靑春座)팀이 그동안 갈고닦은 연기를 바탕으로 회심의 역작을 무대에 올렸던 것이지요.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이 작품에 참여한 제작진들은 화려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극작가 중 한 사람인 임선규가 대본을 썼고, 차홍녀, 전옥, 황철 등의 으뜸배우들이 출연했으니 장안의 화제가 될 만도 했습니다.

이 연극의 제작과 공연의 주역들은 훗날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차홍녀는 병으로 요절했고, 임선규와 황철은 분단 이후 북으로 갔습니다. 임선규는 북한에서 인민배우 문예봉과 혼인하지만 완전히 폐인이 되어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됩니다.

아무튼 이 곡의 배경이 되었던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오빠에게 공부와 출세를 시켜주기 위해 홍도는 스스로 자청하여 기생이 되었습니다. 화류계 생활에서 갖은 고생으로 학비를 모아 오빠를 졸업시켰지요. 여동생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오빠는 순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홍도는 화류계에서 빠져나와 시집을 가지만 삶이 순탄하지 않습니다. 홍도의 과거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온갖 학대로 홍도를 괴롭힙니다.

어느 날 홍도는 실성한 상태에서 시어머니에게 칼을 휘두르고 살인미수로 잡혀가게 되는데, 이때 홍도의 손에 수갑을 채운 순사는 뜻밖에도 홍도의 오빠였던 것입니다. 오,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으리오, 통곡하는 홍도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때, 오빠는 홍도를 위로하며 노래 한곡을 부릅니다. 그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우지마라'였는데, 이 장면에서 관중석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연극을 본 어느 기생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이 너무 비관이 되어 마침내 한강에 투신자살을 했는데, 이 사연이 신문에 보도되어 연극과 노래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극장 앞과 주변은 온통 화류계의 슬픈 사연을 다룬 이 연극을 보러온 기생들로 넘쳐났습니다. 어느 날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500여명의 기생이 아예 손수건을 준비하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이 연극을 보며 흐느꼈는데, 이 때문에 그날 밤은 서울 장안 권번이 온통 텅텅 비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도 이 연극이 많은 기생들에게 그토록 화제가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이 노래가 기생들의 박복한 삶, 고달픈 처지를 마치 그림처럼 생생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지요. 공연의 전후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이 연극이 한국 연극사에서 최고의 장기공연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훗날 어느 비평가는 이 연극을 일컬어 '여성 수난극의 전형, 한국형 최루극(催淚劇)의 원조'라 불렀습니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폭발적 인기에 힘을 얻어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제작되었는데,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된 '홍도야 우지마라' 음반.2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된 '홍도야 우지마라' 음반.
LP음반으로 제작된 '홍도야 우지마라'와 가수 김영춘의 모습.3
LP음반으로 제작된 '홍도야 우지마라'와 가수 김영춘의 모습.
이 영화의 주제가로 올린 곡이 바로 '홍도야 우지마라'였습니다.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대중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구름에 싸인 달, 세상은 구름, 홍도는 달빛' 등의 가사 대목들은 1930년대 당시 식민지 백성들의 어둡고 먹구름 낀 삶에 깊은 울림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 음반의 판매수량은 무려 10만장이 넘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물량이 한꺼번에 수송되어야 하는 물류 때문에 콜럼비아레코드사 영업부에서는 부산역과 서울역에서 화물운송을 담당하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홍도야 우지마라'란 노래를 음반에 직접 취입한 가수가 김영춘(金英椿)입니다. 자기 목소리로 취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이 노래의 제목만 기억했지 가수에 대해서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수 김영춘! 191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김종재입니다. 1937년, 열아홉에 김해농림고등을 졸업하고, 시국이 점차 일제말의 깊은 어둠을 향해 치달아가던 1938년, 김영춘의 나이 불과 스무 살에 콜럼비아레코드사 주최 전국가요콩쿠르에 출전하여 입상하고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김영춘의 첫 데뷔곡은 그해 11월에 발표한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 김영춘 노래, 콜럼비아 40838)입니다.

김영춘 노래의 전문작사자로는 처녀림, 김상화, 이고범, 이하윤, 남해림, 부평초, 산호암, 이가실, 함경진, 남려성, 을파소 등이었고, 작곡가로는 김송규, 김준영, 이재호, 이용준, 김기방, 남전, 어용암, 한상기, 손목인, 하영랑, 남전 등입니다. 여기서 처녀림은 극작가 박영호 선생의 필명이고, 이가실은 시인 조명암 선생의 또 다른 필명입니다. 이하윤, 을파소(김종한), 유도순, 이고범(이서구) 등의 문학인들이 노랫말 짓는 일을 맡았지요.

이들과의 합작으로 만들어 김영춘이 불렀던 가요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히트곡 '홍도야 우지마라'를 비롯하여 '항구의 처녀설' '국경특급' '당신 속을 내 몰랏소' '북국천리' '동트는 대지' '나그네 황혼' '청춘마차' '장장추야' '희미한 달빛' '향수천리' '타향에 운다' '버들닢 신세' '인정사정' '남국의 달밤' '비연의 청춘항' '유랑써커쓰' '항구의 항등' '포구의 여자' '잘 있거라 인풍루' '청노새 극장' '타향사리 목선' '사막의 환호' '바다의 풍운아' '사륜마차' '항구야 잘 있거라' '동아의 여명' '아류산 천리' '목란의 자랑' '의주에 님을 두고' '성황당 고개' '항구의 전야' 등 30여곡이 전부입니다.

워낙 '홍도야 우지마라' 한 곡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에 김영춘의 다른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리고 만 것이지요. '홍도야 우지마라'는 원래 남일연이 불렀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노래의 뒷면에 실렸는데, 이곡보다 오히려 뒷면의 곡이 대히트곡이 되었고, 이로써 김영춘은 콜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가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일제말 김영춘은 이규남, 송달협, 이화자, 박향림 등과 함께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지만 생활은 힘들고 곤궁하기만 했습니다. 이윽고 1950년대로 접어들어 가수 박재홍이 '홍도야 우지마라'를 다시 취입하고 크게 히트를 시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 의식의 원형에서 '슬픈 홍도'가 하나의 표상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같은 제목의 라디오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1995년 경기도 시흥 방산리에는 '홍도야 우지마라' 가요비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이 고장 출신 문화인 이서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뜻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찾는 이 없는 가수 김영춘의 노후는 한없이 쓸쓸했습니다. 2006년, 88세를 일기로 가수는 세상을 떠났지만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원형으로 영원히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이동순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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