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덕을 겸비한 미인


반(班)씨 가문은 한(漢)나라 때 아주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반표(班彪), 반고(班固), 반초(班超) 등은 모두 당대의 풍운인물이었다. 지혜와 덕을 겸비한 미인 반첩여(班婕妤 기원전 48-기원전 6)는 반표의 고모이자 반고와 반초의 고모할머니에 해당한다.


▲ 지혜와 덕을 겸비한 미인 반첩여./그림=유쯔(柚子)


반첩여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영리했다. 그녀는 한 성제(成帝 기원전 51-기원전 7년) 때 궁궐에 들어갔고 지혜와 미모를 겸비해 성제의 총애를 받으며 ‘첩여(婕妤)’에 책봉됐다. ‘첩여’란 비빈(妃嬪)에 해당하는 후궁의 직위다.


반첩여는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음에도 오히려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자중했다. 한 성제는 늘 그녀 곁에 머무르며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황제는 특별히 큰 수레를 제작해 반첩여와 함께 타고 외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황제의 이 제안은 좋아할 줄 알았던 반첩여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녀는 말하기를 “역사상 성스럽고 현명한 군주가 외출하실 때는 모두 명신(名臣)이 옆에 있었습니다. 황상께서 저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외출하신다면 혹 폐하의 현명한 덕과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의 말씀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간청했다.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그녀의 권고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후가 이 소식을 들은 후 반첩여의 고상한 품행을 칭찬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대에 번희(樊姬)가 있었다면 지금은 반첩여가 있구나.” <번희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장왕의 애첩으로 장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장왕에게 정사에 매진할 것을 간언하며 육식을 끊었던 여인이다.>


또한 반첩여는 문학과 사학에 대한 교양이 높아, 시나 문장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경전에서 근거를 찾고 광범위한 자료를 인용할 줄 알았다. 글을 아는 여자가 귀했던 당시로선 실로 재녀(才女)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나이가 들자 나중에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궁궐에 들어와 반첩여의 자리를 대신해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성제는 하루 종일 비연 자매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황후 허(許)씨는 조(趙)씨 자매를 원망해 대전에 신단(神壇)을 설치한 후 밤낮으로 경을 읽으며 황제가 하루 빨리 정신을 차리고 조 씨 자매에게 재난이 닥치도록 저주했다. 조비연자매가 이 사실을 알고는 반첩여와 허황후가 자신들을 음해한다고 성제에게 알렸다. 이 일로 허 황후는 폐위가 거론되고 반첩여 역시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았다.


성제는 과거 자신이 총애했던 반첩여였지만 직접 심문했다. 반첩여는 황제의 서슬 퍼런 심문에도 위축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황제를 대했다.


“신첩이 듣자하니 사람이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고 합니다. 몸을 바르게 닦아도 오히려 복을 얻지 못하거늘 어찌 삿된 욕심을 바라겠습니까? 만약 귀신이 안다하더라도 어찌 비방하는 말을 들을 것이며, 귀신이 모른다면 저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첩은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반항하지도 않는 그녀의 태도는 성제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했다. 성제는 더 이상 그녀의 죄를 추궁하지 않았고 상금으로 황금 백 근을 내렸다.


반첩여는 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총명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지녔으며, 덕과 지조가 있는 현숙(賢淑)한 여인이었다. 대궐의 후궁들이 서로 다투고 모함하며 질투하고 배척하는 중에도 그녀는 자발적으로 장신궁(長信宮 태후궁)에 들어가 황태후를 모시는 길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다른 후궁이나 황제와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조 씨 자매의 질투에서 벗어났다. 평범하지 않은 반첩여가 내린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반첩여의 문학 작품은 아주 많은데 특히 장신궁에 들어온 후의 우울한 심사를 토로한 작품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중공의 문화대혁명으로 유실돼 지금 남아 있는 작품은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搗素賦)’ ‘원가행(怨歌行)’ 세편뿐이다. 이 중 ‘원가행’이란 시는 반첩여가 황제의 총애를 잃은 후의 안타까운 심정을 잘 표현한다.


新裂齊紈素(신열제환소) 제 땅에서 난 비단을 새로 잘라내니

皎潔如霜雪(교결여상설) 눈 같이 희고 깨끗하여라

裁爲合歡扇(재위합환선) 잘라서 합환선 부채를 만드니

團圓似明月(단원사명월) 보름달 같이 둥글어라

出入君懷袖(출입군회수) 임의 품속을 출입하며

動搖微風發(동요미풍발) 흔들림에 일어나는 바람이어라

常恐秋節至(상공추절지) 가을이 찾아와

凉飇奪炎熱(양표탈염열)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몰아낼까 두렵다오

棄捐篋笥中(기연협사중)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지면

恩情中道絶(은정중도절) 임금의 사랑이 중도에서 끊어지고 만다오


반첩여는 무더운 여름날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서늘한 가을이 되면 상자 속에 버림받는 부채를 통해 더 이상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을 비유했다.


특히

常恐秋節至(상공추절지) 가을이 오면 두려워지네

凉飇奪炎熱(양표탈염열) 서늘한 바람은 더위를 앗아가고

棄捐篋笥中(기연협사중) 님의 마음에서 버려지니

恩情中道絶(은정중도절) 은혜로 사랑하는 마음도 끊어지누나


라는 4구절에서 반첩여는 절로 한숨이 나게 할 정도로 자신의 어려운 처지와 쓸쓸한 마음을 표현했다.


성제의 버림을 받은 몸임에도 성제가 죽은 후 반첩여는 적막한 망자의 묘지 옆에서 수도자처럼 살았다. 그녀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이미 영면한 성제 옆에서 쓸쓸하게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