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이 서백후(西伯侯)를 맡고 있던 시기 어느 날 야외로 나갔다가 사람 유골이 백주에 산과 들에 나뒹구는 것을 보고는 수행관들에게 그 유골들을 잘 묻어주라 명했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주인이 없는 유골들인데, 그것들을 관계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자, 문왕이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군왕은 바로 온 천하의 주인이며,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는 바로 그가 관할하는 구역의 주인이다. 이런 유골이 나의 영지에 있으므로 나는 당연히 바로 그들의 주인이다. 이런 유골을 묻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백주에 산과 들에 나뒹구는데 어찌 눈뜨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는 관리들로 하여금 그 유골들을 파묻게 하였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모두 “서백후의 은덕이 주인 없는 유골에 까지 미치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하겠는가?”라고 칭송했다.

이 이야기는 ‘자치통감외기(资治通鉴外纪)’와 명나라 재상 장거정(張居正)의 ‘제감도설(帝鑒圖説)’에 있는데, 이 글은 주문왕이 어질게 세상을 다스려 유골에게까지 그 은덕이 미치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른 이야기를 기록했다.

주(周) 왕조의 창시자는 성이 희(姬)이고 이름은 창(昌)으로서, 상나라 주왕(纣王)에 의해 서백(西伯)으로 봉해졌었다. 이전에 서백창(西伯昌), 백창(伯昌), 주백창(周伯昌)으로 불렸으며, 죽은 후의 시호(諡號)는 주문왕이었다. 나라를 봉하고 건국을 하는 시기,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는 '천하를 다스리는' 공훈이 있는 통치자에게 부여한다. 문왕은 즉위하자 조상들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여 인의를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어진 사람을 예의로 대하였다. 방문 온 사람을 접대하기 위해 그는 늘 점심까지 바쁘게 보냈고 아침밥을 먹을 겨를도 없었으며 식견이 있는 사람은 모두 그를 따르기를 원했다고 한다.

당시 우(虞) ·예(芮)라는 작은 두 나라의 군주가 국경 문제로 서로 싸우면서 오래도록 결판을 내지 못했다. 후에 그들은 함께 주나라로 가서 문왕에게 시비를 가려달라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사람은 주나라 경내로 들어선 후, “농사짓는 자는 밭 경계를 양보하고, 길을 갈 때는 서로 비켜준다.”, “선비는 대부에게 양보하고, 대부는 경에게 양보한다.” 등 여러 가지 겸손하게 사양하는 풍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가 서로 다투는 바는 바로 주나라 사람들이 수치로 여기는 것들이네. 우리는 소인(小人)이니 군자의 조정에 가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 가면 수치스러워질 뿐이네!” 하여 그들 두 사람은 조용히 주나라 경내를 벗어나 돌아간 후 서로 땅을 양보했으며,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

주문왕의 은혜가 죽은 사람에게까지 미친 이야기가 전해진 후, 한남(漢南) 제후들은 모두 각별한 가르침을 얻고는 분분이 와서 문왕에게 귀속하였는데, 40여 개 국가에 달했다. 후에 문왕은 또 위수에서 사람을 기다리던 정치가 강태공(姜尚)을 방문하고, 그를 '사상부(師尚父)'라 불렀다. 이때부터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듯 했다. 주(紂)왕 19년, 문왕은 숭후호(崇侯虎)를 토벌하여 승리하였고, 도성을 풍읍(豊邑)에 옮겼다. 문왕은 풍읍에 영대(靈薹)를 건립하고 또 큰 인공호수인 '영소(靈沼)'를 팠다.

후에 또 30여 개의 나라가 그에게 귀속(歸附) 하였다. 이리하여 문왕은 당시 천하의 3분의 2를 얻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전형적인 ‘위인군지우인(爲人君止于仁)’으로, 제왕이 어진 정치를 실행한 본보기 이기에, 역대의 역사학자들은 '주문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군주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고 여겼다.

중화민족의 역사는 아주 다양하다. 역사의 기나긴 흐름 속에서 통치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신조는 바로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실행하는 것을 중시하여 백성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어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덕(德)으로, 이것은 통치자 개인의 인품과 덕성 수양에 대한 요구에서 가장 중요한 방면이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만약 자신의 백성들에게 널리 은덕(恩德)을 베풀 수 없고, 백성들에게 자기의 어짊과 관대함을 감수하게 할 수 없다면, 그는 성공한 군주라고 말할 수 없다. 때문에 역대의 유명한 군주들은 모두 자신의 인품과 덕성방면에서 수양을 쌓았다. 또 자신의 어진 덕을 진정하게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절실하게 감수하게 하였다.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현재 대륙을 통치하는 중공은 천리를 거스르고 도의를 배반하는 사당(邪黨)으로서, 중국 역사상의 군왕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중공이 절취한 정권은 국민의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역사상의 군왕들처럼 하늘에서 군권을 수여 받은 것도 아니기에, 중공 사당의 통치는 합법성이 전혀 없다. 중공은 하늘에 대한 경외(敬畏)가 없고, 어진 정치를 실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운다며 소란을 피웠다. 과거 60여 년 간, 적어도 8천만 명의 중국인이 사당에 의하여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또 과거 10여 년 동안 마음을 수련하고 선(善)을 향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잔인하게 박해하였다. 중공 사당은 극악무도한 짓을 다 하였기에, 반드시 하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