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깨달음

작가 : 관명(貫明)


매 사람마다 모두 같지 않은 사상경지가 있다. 인간세상의 걸출한 인물과 수련 과정 중의 사람은 자신의 수양과 수행을 강화하는 것을 통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현실 생활 중에서 생생세세(生生世世)의 인연관계 때문에 사람들은 악의적인 욕설, 공갈, 중상(中傷), 질투, 혹은 질책 등을 완전히 모면하기란 아주 어렵다. 욕설을 마주했을 때 어떠한 심리 상태와 방법으로 대응하는가는 그 사람의 사상 경지의 높고 낮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역사서적의 기재에 따르면 송(宋)대의 명신인 부필(富弼)은 젊었을 때 도량이 아주 넓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욕할 때면 못 들은 척 했고 자기가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했는데 마치 아무것도 못 들은 것 같았다. 한번은 아주 흉악한 사람을 만났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에게 욕을 했다. 곁에 있던 누가 부필에게 말해 주었다. “저 사람이 지금 당신을 욕하고 있어요!” 부필은 도리어 “천하에는 동명이인이 많으니 부필이 꼭 나라고 할 수야 없지요.”라고 말했다. 욕설을 퍼붓던 그 사람은 부필이 거들떠보지도 않자 아주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욕하지 않았다.


만일 부필이 당시에 날카롭게 서로 맞서 한마디씩 욕을 했다면 반드시 모순이 격화되어 대판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평온하고 태연한 마음으로 참고 양보한다면 상대방의 노기도 얼음 녹듯 풀릴 것이고 나쁜 인연도 선해될 것이다. 참을 수 있고 양보할 수 있는 자는 그 덕이 반드시 클 것이요, 무릇 일에 부딪쳐 참지 못하는 자는 그 흉금이 아주 좁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치욕을 참아내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구도하고 있을 때 전해지던 말이다. 한 시기 늘 어떤 사람이 질투하면서 욕을 했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는 편안히 침묵하면서 태연하게 대했으며 사람을 구도하는 일만을 열심히 했다. 어느 날 욕을 하다 지친 그 사람에게 석가모니 부처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친구여,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보냈으나 그 사람이 굳이 사양한다면 이 물건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그 사람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물건을 보낸 사람의 것이지요.” 석가모니는 말씀하셨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까지도 당신이 줄곧 나를 욕했는데 내가 만일 당신의 욕설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이 욕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오?”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석가모니의 오묘한 질문에 그 사람은 일시 할 말이 없게 되었고 그 후 더 이상은 감히 석가모니를 욕하지 못했다.


인식공격성 욕설을 마주하여 부필(富弼)이나 석가모니처럼 그렇게 태연한 사람은 아주 적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즉시 깨달을 수 있는바, 만약 침착하지 못하고 조급하여 이에는 이로 갚는 식으로 맞받아 욕을 한다면 사실 이는 무지한 행위이다. 만약 욕설에 마주하여 싱긋 웃어 주거나 평온한 말로 욕설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의 풍격을 갖춘 것이다. 만약 욕설에 마주하여 마음이 평온하고 행동이 태연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바로 각자(覺者)의 대(大) 지혜이다. 물론, 한 보통사람이 수련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대각자가 지닌 그런 지혜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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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강물의 싸움 고사 2007. 5. 23. 09:59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때 우물이 뜻밖에 강물을 만나게 되었다.

우물은 이상하게 여기며

“여보세요!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강물은 대답하기를

"나는 강물이에요! 누구나 다 나를 알고 있는데

당신은 누구시죠?”

우물은 “나는 우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이미 우리 우물이 있는데 왜 당신들 강물이 필요한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니

강물은 대답했다.

“우리 강물이 없으면 만물이 생존할 수 없어요.

강물에는 또 많은 생명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고기와,

생명에 필요한 물질들이 다 있어요.

오히려 당신들 우물은 있어서 뭐하나요?

당신들 우물이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번성할 텐데요.”


우물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반박했다.

"당신들 강물은 세상 어디에나 갈 수 있나요?

하지만 우리 우물은 갈 수 있어요.

어느 곳에서든지 우물을 파면

우리 우물은 사람의 요구에 따라

찾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퍼내고 퍼내도 끝이 없고

아무리 사용해도 끊이지 않아요.

당신들 강물이 없어도

우리 우물은 여전히 살아갈 수 있어요.”


이때 한 나그네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그들에게 다가와

“당신들이 분쟁하지 마시오.

사실 당신들 모두 중요하며,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들이지요.

당신들은 지금 왜 분쟁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신들의 마음에 오직 자신밖에 없고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늘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과 비교하기 때문이오.


만약 상대방의 장점을 보면서

수시로 자기에게 어떤 단점이 있는가를 헤아려 본다면

당신들이 더 분쟁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은 모두 자신의 단점을 보도록 하세요.”

강물과 우물은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

/작가 연원(緣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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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선소전 장삼풍(2) 고사 2007. 5. 22. 18:16

列仙小傳(22) 장삼풍(張三豊) (2)

ⓒ 삽화/박영철
[대기원]땅에 묻은 이빨에서 연꽃잎이 솟아나다

촉 헌왕 주춘의 예물에 대한 답례로 장삼풍은 품속에서 한 손 가득 대추를 꺼냈다. 그 대추들은 반쪽이 붉고 반쪽은 푸른데 모두들 한 나무에서 자란 것들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손님들은 비록 뜻밖이라고 느꼈으나 장삼풍이 사전에 몸에 감추고 있었다고 여겼으므로 그리 신기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장삼풍은 연회석에서 황금 잔 하나를 들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당의 흙이 있는 곳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장삼풍은 입안에 손을 넣어 이 하나를 뽑아내어 흙속에 묻었다. 이를 흙속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에서 푸른색 싹이 트더니 자라기 시작하여 연잎이 되었다. 그 연잎에서 꽃대가 하나 쑤욱 올라오더니 연꽃 한 송이가 피었다. 연꽃 송이는 큰 쟁반만 하였다.

연꽃의 꽃 판은 매 판마다 가지각색의 반점이 있으며 꽃 판이 점점 많아지더니 거의 천개에 육박하였다. 연꽃의 휘황찬란한 빛깔이 집안에 가득하며 맑은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손님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충심으로 기뻐하면서 심복하였다. 촉 헌왕 주춘 또한, 몸소 붓을 들고 시를 지어 장삼풍 진인에게 선물하고 이 날의 성대한 광경을 기록했다.

죽은 장삼풍의 관속에는 시체가 온데 간데 없고

장삼풍이 사천성에서 이러한 도술을 펼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올 때 장삼풍은 이미 한 번 죽었다고 한다. 이 때가 명나라 홍무(洪武) 24년 (1391) 9월이었다. 장삼풍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게송까지 남겼다. 죽은 후, 제자 양궤산(楊軌算) 등이 염을 하고 입관했다고 한다. 사천에서 들려오는 장삼풍의 기이한 소문을 듣자 제자들은 감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크게 먹고 제자들은 사부 장삼풍의 관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관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명태조 주원장은 사람을 시켜서 장삼풍을 찾았으나 이때부터 장삼풍의 행방이 묘연했다고 한다.

장삼풍 진인은 명나라 초기에 호북성 무당산(武當山)에서 도교 사업을 부흥시켰으며 그 곳에서 전국최대의 도관을 세웠다. 장삼풍이 일찍이 무당산을 방문했을 때 도관이 전쟁으로 피폐해져 잡초만 무성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곳을 떠나지 말라, 이곳은 앞으로 크게 흥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삼풍 진인 기념관을 무당산에 짓다

명나라 영락제 때 사람을 보내 장삼풍 진인을 다시 찾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여 무당산에 ‘태화궁관’(太和宮觀)을 지어 진인의 뜻을 받들었다. 이때부터 무당산은 도교활동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명 영종 때에는 장삼풍 진인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며 그리고 ‘통휘현화진인’(通徽顯化眞人)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최근에 중국을 시작으로 하여 전 세계에 “법륜대법”(法輪大法: 파룬궁)을 전하고 있는 이홍지(李洪志) 선생은 장삼풍 진인의 태극권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시 한편을 지었는데 한 번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 태극(太極) -
진인개세장삼풍(眞人蓋世張三豊)
진인 장삼풍의 명성, 세상을 뒤덮었는데
대도무적천지행(大道無敵天地行)
큰 도를 천하에 펼칠 때 적이 없었다
후세위명난권법(後世爲名亂拳法)
후세 사람들, 명예를 위해 권법을 어지럽히는데
개오태극괴오명(改吾太極壞吾名)
나의 태극권을 고치고 내 이름을 무너뜨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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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24) 안기생(安期生) (2)

ⓒ 삽화 박영철
[대기원]진시황, 봉래산을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자

진시황은 장생을 일심으로 추구하다가 불로장생술에 푹 빠졌다. 일찍이 각 지방의 많은 방사(方士)를 찾아가곤 하였다. 이제 다행히 신선 안기생의 허락을 받자 신선과 인연이 닿게 될 것이라 여겼다.

진시황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한 무리의 선단(船團)을 동해로 파견하여 자신이 갈 길을 미리 개척하도록 했다. 그러나 먼저 간 한 무리의 사자들이 ‘봉래산을 보았으나 다만 배를 해안에 댈 수 없다.’고 보고하는가 하면 또 바다 가운데 큰 상어가 있어 부대를 더 많이 보내야 한다고 하는 등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무리의 사자들은 한번 가고는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진시황은 이때부터 꼬박 10년을 시도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봉래산을 찾기는커녕 안기생의 얼굴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한무제도 삼신산을 찾았으나

세상에는 같은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듯이 진시황이 죽고 백년 쯤 세월이 흐르고 난 후, 다시 안기생을 몹시 만나고 싶어 하는 군주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신선도에 푹 빠진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다.

한무제는 방사 이소군(李少君)을 불러 신선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소군은 일찍이 동해상에서 ‘안기생을 우연히 만났는데, 안기생이 그에게 선조(仙棗: 신선들이 먹는 대추)를 주어 먹게 했다. 그러나 안기생은 봉래산 가운데 살고 있는데 성격이 괴상하여 뜻이 맞는 사람은 만나보고, 뜻이 맞지 않으면 숨는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 말에 한무제는 오히려 흥취가 일어나는 듯 몸소 목욕재계하여 제사를 지내고 방사들을 동해로 파견하였다. 수년이 흐르고 방사 이소군도 병들어 더 진척되지 않아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다.

천세옹(千歲翁) 안기생의 내력

신선 안기생은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몹시 만나기를 갈구하던 신선이다. 고서적 중에는 안기생을 또 ‘안기’(安期)선생이라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 악의전(樂毅傳)’에서는 악의 가족 중에는 악하공(樂瑕公), 악신공(樂臣公)이 있는데 전국시대 말기 제나라 황노지학(黃老之學: 도가)의 종사(宗師)라고 한다.

그 가르침의 연원도 기록돼 있다. 하상공(河上公)이 안기생을 가르치고, 안기생이 모흡공(毛翕公)을 가르치고, 모흡공이 악하공을, 악하공이 악신공을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서 하상공의 내력에 대해서는 사기의 저자 ‘사마천’조차 그 출신을 모른다고 하였다. 다만 갈홍(葛洪)이 쓴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안기생은 수련과 음식, 단약(丹藥) 등에 의지해 장생을 얻었으며 인간세상에서 일 천년 이상 살았다고 한다.

혼원성기(混元聖紀)라는 책에는 안기생의 도술이 마명생(馬鳴生)에게 전해져, 마명생, 음장생(陰長生), 갈홍으로 이어지는 일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안기생은 동해상에만 거주한 것이 아니다. 중국 남쪽, 북쪽을 망라한 많은 지방에 그의 종적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하남지방의 어떤 사람은 안기생에게서 큰 대추를 얻었는데, 연이어 3일을 구워야 비로소 완전히 익었다고 한다. 그 향기가 10리를 갔으며 병자가 먹으면 낫는 것은 물론 죽은 자도 먹으면 환생하였고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백일비승(白日飛昇)한다는 전설이 떠돌았다.

아무튼 안기생은 많은 서책에 등장하고 있는 높은 선비(高士)이면서 도를 닦아 자신을 깊이 감춘 선인이라 추측할 뿐이다.

(다음 호에는 신선 정령위 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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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25) 마명생(馬明生) (2)

ⓒ 삽화 박영철
공중을 평지처럼 밟아 올라가다

[대기원]젊은 여자가 마명생(馬明生)을 데리고 들어간 동굴(石室)은 지면에서 수백 미터 높이였고, 동굴 아래와 위 모두가 직립으로 솟아 있는 절벽이었다. 그 여자는 마명생의 손을 잡아 당기더니 몸을 날려 위로 올라가는데 마치 평지를 밟고 가는 것 같았다.

동굴 안에 들어가자 그 안에는 황금으로 된 침상과 옥으로 만들어진 기물 등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진기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마명생은 자청해서 그 여자의 하인이 되었다. 하인이 된 이유는 우선 그 여자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으며, 두 번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외상을 치료하기 위해 펼쳐 보였던 신기하고 효험 있는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마명생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사실을 보고 신선을 만난 것이 틀림없으며 자신도 신선이 될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 이에 마명생은 그 여자와 함께 동굴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고 심부름 하는 등 하인으로서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데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젊은 여자가 여인으로 또 요괴로 변해 고험하다

그 젊은 여자는 귀신이나 요괴, 호랑이, 여우 등으로 변신하여 마명생을 고험하였으나 정신을 안정시키고 기운을 고요히 하여 추호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는 마명생한테 밖으로 나가 일을 처리하도록 시키기도 하였다. 또 잠을 잘 때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여 집적거리거나 희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명생은 마음이 굳세고 뜻이 견정하여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동굴 속으로 자주 놀러오는 여자 신선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올 때는 늘 용과 봉황을 수레로 삼아 타고 왔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그 여자가 순식간에 풍성한 잔칫상을 베풀었는데, 상위에는 이름도 모르는 가지가지 진기한 안주와 과일이 놓여 있었다. 도대체 그것들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공중에서는 비파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은근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때때로는 그 여자가 몸소 거문고를 타면서 술좌석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거문고 소리는 그 소리가 아름답고 묘하여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멀리 몇 리 밖까지 전해졌다. 그 소리에 새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동굴 밖에 구름처럼 모였다.

흰 용을 타고 외출을 하다

새들을 쫒았으나 새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평상시에 그 여자는 마명생과 함께 동굴 속에 거주하였으며, 밤이 늦어 잠을 잘 때에는 같은 방이었으나 침대를 달리 하였을 뿐이다. 어떤 때 그 여자는 돌연 10일이나 반달씩 외출하였으나 마명생에게 어디 가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고, 늘 하얀 용(白龍) 한 마리가 동굴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하는 것이 보였다.

그 여자가 구름무늬의 비단 장포를 입고 흰 용의 등위에 올라앉으면 용은 공중을 날아올라 사라진다. 돌아 올 때에도 흰 용을 타고 오는데, 그 여자가 용의 등에서 내려오면 흰 용은 비로소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동굴 안의 옥으로 만든 상위에 있는 자주색 비단이불, 붉은 색 장막, 장막안의 의복이나 기물 등은 모두 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진기한 것들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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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23) 안기생(安期生) (1)

ⓒ 삽화/박영철
[대기원]삼신산의 고사

독자 여러분도 일찍이 진시황이 서불(徐市), 노생(盧生) 을 파견하여 삼신산(三神山)을 찾게 했다는 옛날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신선이 산다는 이 세 개의 산이 바로 봉래(蓬萊), 영주(瀛洲), 장(方丈) 등 3개의 섬이다. 동해 밖에 있는데 모두 술병처럼 생겼고 그 위에 수많은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이 신비한 산은 다섯 개였다. 매산 하나마다 세 마리의 어마어마하게 큰 거북이가 등을 바치고 있었다.

총 열다섯 마리 거북이가 다섯 개 산을 받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와서 거북이 여섯 마리를 낚시로 낚아갔다. 그 결과 산 두 개가 바다에 떠내려 가다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때 남아있던 봉래산 등 세 개의 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으나 배를 저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면 오히려 바다 물밑에 있는 듯했다. 요즈음 사람의 눈으로는 이것을 신기루와 같은 환상이라고 추측할 것이나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해석할 길이 없어 가지가지 전설을 낳았을 뿐이었다.

삼신산을 찾으려 하였으나

진시황은 왜 백성들이 혹사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수만 금의 재물을 세금으로 걷어 한번에 천명 이상의 사람을 파견하여 삼신산을 찾게 하였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서책마다 다르다. 혹자들은 서불이 진시황에게 감언이설로 권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혹자는 진시황이 귀곡자(鬼谷子)를 만났을 때 신선이 사는 그곳에 불사초(不死草)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또 전국시대에 제나라, 연나라 등의 임금들이 신선들이 산다는 동해 가운데 있는 방장산 등을 찾기 시작했다 한다. 따라서 진시황은 단지 그들의 전례에 따라 했을 뿐이다. 다만 열선전(列仙傳)에는 다른 설명이 있다. 진시황이 삼신산을 찾으려 하는 이러한 배경에는 사전에 어떤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약속의 상대가 바로 유명한 신선 ‘안기생’(安期生)이다.

약파는 신선, 천세옹(千歲翁) 안기생

신선 안기생은 산동성 낭야 부향(阜鄕)사람이다. 바닷가 동해 일대에서 약(藥)을 팔았다. 안기생이 파는 약을 사서 먹은 사람은 매우 영험이 있어 당시 그 일대 사람들에게 안기생은 몹시도 숭배받는 대상이었다.

심지어 세간에서는 안기생은 이미 연세가 천세가 넘었다고 소문이 났다. 해서 존칭으로 ‘천세옹’(千歲翁)으로 불렸다.

당시 중원을 통일하고 천하를 순행하던 진시황도 동해에 도착했을 때 안기생의 고명한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진시황은 안기생을 초청해서 3일 밤낮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진시황의 얼굴에는 커다란 기쁨의 미소가 넘쳤고, 안기생에게 수 천만전의 황금과 값진 구슬을 상으로 내렸다.

이에 안기생은 상으로 받은 값진 보물들을 모두 부향의 역참 내에 남겨두고 말없이 떠났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보답으로 붉은 옥으로 만든 신발을 하나 남겨 놓은 채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시황이 안기생이 남겨놓은 편지를 펼치니 그곳에는 “몇 년이 지난 후 봉래신산(蓬萊神山)으로 나를 찾아오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일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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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22) 장삼풍(張三豊) (1)

ⓒ 삽화/박영철
[대기원]도교 양대 교파를 융합하는 데 일조

동한(東漢)때부터 교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도교는 금나라, 원나라에 이르러 크게 정일교(正一敎)와 전진교(全眞敎), 양대 교파로 나누어진다. 지역적으로 대체로 양자강과 회수(淮水) 남북지역을 경계로 한다.

남쪽은 정일교 위주였고, 북쪽은 전진교 위주였다. 정일교는 주로 도가전적, 단약(丹藥)을 만들어 복용하거나 부적 등을 채용하였다. 전진교는 자신의 도덕수양이나 수련을 중요시하였다. 원나라 말기나 명나라 초기에는 이들 양대 교파가 교류하고 융합하는 추세가 일어났는데 그때 상당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장삼풍(張三豊) 진인이다.

태극권의 창시자

한편 몇 년 전 중국 영화배우 이연걸이 주연한 ‘태극권’이라는 영화가 전 세계에 인기리에 상영된 적이 있다. 이 태극권의 창시자가 장삼풍 도인이다. 무협지에는 중원 팔대문파 중, 무당파의 개파 조사로 그 이름이 무수히 등장하여 보통사람들 귀에 익숙할 것이다.

장삼풍의 이름은 ‘전일’(全一), 호는 ‘삼풍’(三豊)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군보(君寶)’이고 ‘전일(全一)’은 그의 자라고도 한다. 또 이름이 ‘통(通)’, ‘금(金)’, ‘현일(玄一)’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뿐 아니라 상당히 많다.

낡은 장삼과 풀로 만든 모자를 쓰고

민간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삼풍은 외관을 꾸미지 않았으며 추위와 더위를 불문하고 늘 한 벌의 다 찢어져가는 장삼과 풀로 엮어서 만든 낡은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시간이 오래되자 낀 때가 반들반들 하게 되어 광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납탑’(ZHANG LA TA : 불결하다, 지저분하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을 하나 얻었다고 한다.

장삼풍의 본적이 요주(遼州), 의주(懿州), 보계(寶鷄) 등이라는 주장이 있고 심지어 사천, 호북, 산서 등도 그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정확히 고증하기는 어렵다. 장삼풍이 득도한 시기조차도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 때라는 각기 다른 주장이 있다. 이러한 불명확한 주장들은 오히려 그의 신비한 면을 나타내기도 하면서 그가 천하를 널리 주유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종적도 또한 일정하지 않다.

한 번 먹으면 수 개월을 먹지 않다

흔히 신선들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기이한 행적과 술법들이 등장하는데 장삼풍도 자연히 예외가 아니다.

밥을 먹으면 한 자리에서 잠깐 동안 솥단지 채로 먹어치웠는데 몇 달 동안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었고, 각처에 분신(分身)이 동시에 나타났다. 무슨 약을 쓰던지 병을 낫게 할 수 있었고 늙음을 되돌릴 수 있는 회춘의 묘술이 있었다. 죽어가는 병자를 소생시켜 걸어갈 수 있게 하였는데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명나라가 세워지고 촉(蜀) 헌왕(獻王)으로 봉해진 주춘(朱椿)은 명태조 주원장의 열한 번째 아들인데 여러 왕자 중에서 비교적 취미가 고상하고 손님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헌왕(獻王) 주춘(朱椿)을 ‘독수재(獨秀才)’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독수재 주춘이 촉땅 사천에 있을 때 장삼풍을 손님으로 초청해서 환영의 자리를 성대히 마련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진기한 물건들을 선물로 내놓았는데 모두 그 진귀함에 찬탄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장삼풍이 자리에서 일어나 “빈도(貧道) 또한 변변치 못한 선물을 준비하였사온데 원컨대 전하께서는 웃음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글/김일륜 기자
삽화/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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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25) 마명생(馬明生) (1)

ⓒ 삽화 박영철
도둑의 칼에 찔려 생사의 갈림길에 직면

[대기원]마명생(馬明生)은 동주(東州) 전국시대 제나라 임치(臨淄)사람이다. 본래 성은 '화'(和)씨이고, 이름은 '군실'(君實)이라고도 한다.

젊었을 때 '화군실'은 일찍이 현의 관리가 되었다. 한번은 도둑을 잡다가 도둑과 격투가 벌어졌다. 궁지에 몰린 도둑이 칼로 화군실의 가슴 부위를 찔렀다. 곧 화군실은 혼절하여 생사가 오락가락 하였다. 화군실이 혼미한 상태에 빠진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 차츰 들었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곁에는 16-7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몸에는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생기발랄하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정신이 돌아온 화군실에게 그 여자아이가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다가 몸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까?". 화군실은 여자아이에게 상처를 입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여자아이가 건네주는 약을 먹고

그 여자 아이는 화군실의 상처를 가리키면서 “당신의 이 상처는 병장기로 폐부를 깊이 찔려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 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미 심장 주위를 굳게 만들었고, 폐부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기가 이미 복강(腹腔)을 뚫고 들어갔으니, 당신은 필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고 하였다.

화군실이 이 말을 듣고 그녀를 다시 한번 쳐다보니 그녀의 기색과 자태가 성스러우면서 고귀한 풍도가 풍겼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화군실은 사력을 다해 일어나 몸을 굽혀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그 여자는 품속에서 콩알만한 둥근 약 한 알을 꺼내더니 화군실에 건네주면서 삼키도록 하였다. 화군실은 이 환약을 복용하자마자 한 줄기 따뜻한 기운이 단전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 따뜻한 기운이 사지 백 맥을 따라 전신을 두루 돈다. 따뜻한 기운이 미치는 곳마다 고통스럽고 쇠약해진 느낌이 사라지며 힘이 생기고 상처부위 또한 출혈이 멈추고 새 살이 돋아났다. 더는 고통이 없으며 상처가 다 나은 듯하였다.

목숨의 은혜, 하인을 자청하다

화군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자 기쁜 나머지 감사인사를 올렸다. “목숨을 구해주신 이 은혜, 돈과 재물로는 보답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합니다. 제가 낭자에게 힘을 다해 도와 드릴 곳이 있다면 낭자께서는 분부만 내리십시오. 제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반드시 나에게 보답하고자 하니, 당신의 성의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럼 당신은 나를 따라 함께 갑시다.”

화군실은 이때 비로소 자기 본래 이름인 ‘화군실’을 버리고 새로 거듭나기 위해 ‘마명생’(馬明生)으로 이름을 바꿨다. 관리로서 벼슬과 재물(家産)을 다 버리고 그녀의 하인이 되어 함께 길을 떠났다. 그 여자는 마명생을 데리고 태산(泰山)으로 갔다. 태산의 어느 한 곳, 높고 험한 절벽위로 올라가더니 한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호에 계속)

김일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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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화룡점정(畵龍點睛)



장승요(張僧繇)는 남조 양무제(梁武帝, 502-549년 재위)의 우군장군이자 당대 유명한 화가로, 인물화에 특히 뛰어났다. 양무제가 각지에 떨어져있는 아들들이 보고 싶으면 장승요에게 가서 그려오도록 하였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살아있는 듯 생생해 무제는 그 그림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동물을 묘사하는 것도 즐겼는데, 예전에 집 동쪽 벽에는 매 한 마리를, 서쪽 벽에 도요새 한 마리를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원래 처마 밑에 살고 있던 새들이 두려워 다시 오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 소주 화엄사 대웅전에 용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림을 완성하자, 갑자기 광풍과 폭우가 몰아치며 벽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여, 다시 쇠사슬을 그려 넣어 용을 붙들어 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소문에 불과하다며 믿지 않았다.

당나라 장언원(張彦遠)이 지은 ‘당대명화기 – 권7’에 보면, 금릉 안락사의 스님이 장승요에게 용을 그려달라고 청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려고 앞다투어 안락사로 몰려들었다. 장승요가 말 한마디 없이 집중해 그림을 그리자, 오래지 않아 용 네 마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용의 눈을 그리지 않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매우 이상할 것이다. 사실 눈은 용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다른 부분을 완성하는 것은 단지 형체를 그리는 것이나 눈을 그리면 생명이 깃들게 되어 날아가 버린다.”

“눈을 그리는 것만으로 날아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며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자, 장승요는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용 두 마리의 눈을 그려 넣었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면서, 두 마리 용이 벽을 부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눈을 그리지 않은 두 마리 용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장승요의 뛰어난 솜씨를 찬탄하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생생함을 예찬할 때, ‘화룡점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말을 하거나 문장을 쓸 때,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한 두 마디 말로 주제를 명확히 하고, 내용을 깊이 있고 생생하게 만든다면, ‘화룡점정’에 비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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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하정숙
[대기원] ‘신의(信義)’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노(盧)나라의 미생(尾生)이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보름달이 뜨는 날 밤 다리 아래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래도록 기다리다 소나기에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죽은 인물이다. 이러한 미생을 두고 예전 사람들은 신의의 대명사로 추앙했으나, 요즘 사람들은 융통성이 너무 없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생의 죽음을 가치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생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미생의 연인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친구에게 고통을 남기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미생이 차라리 신의를 지키지 못한 것이 낫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잃는다는 것은 미련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 사람들은 미생의 ‘정신’을 본 것이지 미생의 행위 결과를 두고 판단한 것이 아니다. 미생이 강물에 휩쓸려 죽을 때까지 다리 아래에 있었던 것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만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신뢰 또한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오는지 안 오는지 두고보자는 오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버틴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기다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미생 정신의 가치는 물질적으로 환산할 수 없다. 이는 제나라 왕이었던 환공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환공이 노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자 노나라 왕은 자기 나라 수읍 땅을 내 놓으며 휴전을 청했고, 이를 수락하는 조약을 맺는 자리에서 노나라 장군 조말이 갑자기 뛰어들어 환공의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그리고는 그동안 빼앗은 땅을 내 놓으라 하면서 목숨을 위협했다. 환공은 급한 나머지 요구를 들어준다고 했지만 위협에서 벗어났을 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때 관중이 정색을 하면서 “폐하께서 그자에게 협박당해 어쩔 수 없이 한 약속이었다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이므로 지켜야 하옵니다. 만약 조말을 죽인다면 신의를 저버리는 것으로 화풀이에 불과할 따름입니다.”라고 했고, 환공 또한 관중의 말에 따랐다.

불공정한 상태에서 맺은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키려한 선인들의 아름다운 덕목이 재삼 그리워진다.
<글:공영화,학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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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을 받고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니 자손에게 화가 미쳐


청나라 때 강음(江陰)에 유생(俞生)이란 사람이 있었다. 건륭(乾隆) 말년에 향시(鄕試)에 참가했다가 첫 시험을 다 치르지 못하고 초열흘 날 날이 밝자마자 물건을 수습해 떠나려 했다. 곁에 있던 수험생이 그가 답안을 다 작성하지 못한 것을 알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 원인을 물었다. 유생(俞生)의 얼굴은 매우 상심하고 낙담한 표정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재차 캐묻자 그제야 그는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의 부친은 반평생 관리로 있었다. 나중에 퇴직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죽기 전에 그들 4형제를 불러놓고 울면서 자식들에게 말했다. “내 평생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지 않았었는데 한번은 현령으로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천금(二千金) 뇌물을 받고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다. 어제 내가 명부(冥府)에 불려가 심판을 받았는데 본래 법에 따라 당장 참수형을 받아야 했다. 그나마 조상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공덕이 있어 자손 중에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지만 5세대까지 빈천(貧賤)할 것이다. 나의 지옥에서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만약 자손들이 공명을 얻으려 한다면 나의 죄에 죄를 더하는 것과 같고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 형제들이 착한 일을 많이 하기 바란다!”

말을 마치자마자 부친은 눈을 감았다. 나중에 유생의 형제들이 과연 잇달아 사망하고 그 혼자만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향시에 두 차례 응시했는데 매번 답안이 더러워졌다. 어제 삼경에 답안지에 정식 답안을 쓰려하니 갑자기 부친이 나타나 질책하기를 “네가 덕을 쌓아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고 나의 유언을 위반하여 나를 도처에서 고생하게 하고 죄를 더 가중되게 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수갑 찬 손으로 촛불을 떨어뜨려 답안지를 더럽혔다.

유생은 마지막으로 “내가 세 차례 낙방하긴 했지만 유감은 없습니다. 단지 가슴 아픈 것은 부친이 죄를 범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산속에 들어가 부처수련을 해서 부친의 망령(亡靈)을 구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모두들 듣고선 다 혀를 내두르면서 인과응보는 정말이며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같이 수험을 치른 천푸칭(陳扶青)이 특별히 《산으로 돌아가다(歸山)》는 시를 한수 써서 그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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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록상의 고구려 영토

①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영락 8년 영락태제(광개토대제)가 토곡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토곡은 토곡혼을 말하는데 토곡혼은 티베트에 있던 국가였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저 멀리 티베트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②중국 역사책 위서
중국의 역사책인 위서를 보면
"398년 북위의 수도 였던 업에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하므로 왕이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도읍을 평성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북위의 수도였던 업(오늘날 태원)에 고구려인 56만명이 있었다는 것과 북위 조정이 이들을 두려워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정벌하여 영토를 산서성 이남까지 확대했음을 의미합니다.

③한단고기
한단고기를 보면 고구려 21대 황제 문자호태열제 때 신라인을 복건성 천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자호태열제 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신라인을 이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인을 중국 최남단인 복건성 천주(홍콩 근처)에 이주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2.고고학 상에 의한 고구려의 영토

①덕흥리 고분 벽화
북한 평남 대안시에 가면 덕흥리 고분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의 주인공은 유주자사 진으로 광개토대왕 때 활약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벼슬인 유주자사에 유의해야 합니다.
유주는 오늘날 중국 북경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인데 고구려 고분의 주인공이 유주자사라는 것은 고구려가 이미 북경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지요

②아프가니스탄의 아프라시압 벽화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아프라시압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신이 그러져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적어도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진출했다면 소설 광개토대제는 소설의 상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 1. 고구리(高句麗) 최대영역은 동북아시아 전역이었다 ! >

# 서화(西華) 동쪽을 다스렸다는 기록과 반도를 통치했다는 기록들 #

지금까지 고구리(高句麗)영토는 만주와 반도 북부에 국한하고 있으나 이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반도가 고구리영역이였음을 나타내는 유적과 유물

① 경남경주의 황남대총에서 영락(永樂 : 광개토대왕연호)이 새겨진 항아리
② 창녕진흥왕 비문에서 碑利城(비리성)
③ 중원고구리비(碑)에서 고리대왕상왕(高麗大王相王)
④ 한강이남의 석촌고분, 안동의 방형묘, 경주의 방형묘는 즙안의 고구리(高句麗)고분과 흡사하다.
⑤ 평남 대안시 대흥리에서 발굴된 진(鎭)묘비
⑥ 평안도청에 있는 평양성벽각자
⑦ 태천의 고구리성벽각자(高句麗城壁刻字) 등

반도 전역에서 고구리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기록으로는
- 삼국사기의 간(干 : 환도성간, 마립간 : 丸都城干, 麻立干),
- 삼국유사의 마립간("한"음"간"), 구간(麻立韓, 九干) 등이 있다.

㉯ 서화(西華)(중국하남성)의 동쪽에서부터 고구리 영역임을 나타내는 기록


① 고구리,맥제 강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였다. (최치원전)
② 섭라(涉羅 : 안휘성)를 고구리가 맥제에게 빼앗겼다. (위서, 북사, 삼국사기)
③ 항성(項城 : 하남성)을 맥제가 고구리와 함께빼앗으려 하였다. (신구당서, 삼국사기)
④ 태원(太原 : 산서성)을 모본왕2년(49년)에 평정하였다 (후한서, 삼국사기)
⑤ 광녕(廣 ), 代(내)가 광개토대왕시대, 고구리지(高句麗地)이다. (진(鎭)묘비)
⑥ 신성(新城 : 銀山 : 은산)에서 당과 고구리가 전투를 하였다 (신구당서, 삼국사기)
⑦ 선비(鮮卑)는 BC9 년부터 고구리민(高句麗民)이다. (삼국사기의 유리왕, 신구당서의 가한신(可汗神))
⑧ 5세기 이전 사로신라는 고구리, 맥제(百濟)에 속하여 있었다 (북사)

위와같이 고구리의 최대영역은
- 서화(西華) 중심의 남쪽 월(越)에서 부터
- 섭(흡과 동음: ), 태원, 광녕(太原, 廣 )으로 이어지는 선과
- 선비의 영역을 포함하였고,
- 동으로는 반도의 경주까지 아시아 전역이 高句麗의 영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고구리의 후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 있으니
- 반도의 코리아(고리:高麗),
- 몽고(蒙古 : 몽고리 : 蒙高麗),
- 위구르(爲溝 ),
- 黎(리)등은
고구리의 후예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고구리의 최대영토는
-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영토이며
- 구리(九黎)시대의 영역인 것이니
기록이 많은 시대 고구리를 명확히 밝혀서 동이(東夷)의 유구한 역사를 바르게하여야 할 것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한 고구리(高句麗)의 영역 >


- BC 30년 행인국(行人國)을 병합
-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병합
- BC 9년 선비(鮮卑)를 병합
- 14년 양맥(梁貊)을 병합, 한고구리현(漢高句麗縣)병합
- 22년 부여(夫餘)를 병합(동부여)
- 26년 개마국, 구다국(蓋馬國, 句茶國)을 병합
- 32년 낙랑왕국(樂浪王國)을 병합 (반도와 만주로 진출)
- 37년 낙랑군(樂浪郡)을 병합 중원으로 진출
-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
- 56년 동옥저(東沃沮) 병합(동으로 창해(滄海), 남으로 살수(薩水)=하북성의 중북부지역)
- 72년 조나(燥那) 병합
- 74년 주나(朱那) 병합
- 121년 遼隊(요대), 新昌(신창)에서 전투
- 146년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에서 전투
- 169년 현도태수와 부산(富山)을 평정
- 242년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을 평정
- 300년 (낙랑대방(樂浪帶方)이 강회(江淮) 사로신라에 귀속)
- 302년 현토군(玄 郡)을 평정
- 311년 요동서안평을 평정
- 313년 낙랑군을 평정
- 314년 대방군을 평정
- 315년 현토군(玄 郡)을 평정
- 385년 용성(龍城)을 평정
- 391년 남으로 맥제(百濟)를 북으로 계단(契丹)을
- 468년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동신라 ?)
- 475년 맥제(百濟)의 한성(漢城)을 함락(요의 동쪽에)
- 494년 신라와 살수(薩水)에서전투(맥제가 지원)
- 503년 동신라(東新羅)독립(요하의 동쪽)
- 504년 이전 섭라(涉羅 : 안휘성)을 맥제에게 병합
- 550년 맥제가 도살, 금현등 두 성을 공격하니 그 틈에 新羅(서신라)가 고구리의 두성을 빼앗음 (서신라의 광복운동(?))
- 631년 동신라와의 국경에 장성을 구축(동북의 부여성에서 동남의 해(海)까지)
- 645년 당과과 고구리 전투지명 용도, 은산, 신성, 고대인성, 건안,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甬道, 銀山, 新城, 古大人城, 建安, 蓋牟城 白巖城 安市城)
- 647년 신성, 석성, 적리성(新城 石城, 積利城)에서 전투
- 668년 고구려역사 九百年( BC239-AD668년)


< 주(周), 진(秦), 한(漢)의 전통을 이은 장안중심의 한족(漢族)기록에서 고구리영역 >


㉠ 후한서 (後漢書)

- 49년 한(漢)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右北平(우북평), 漁陽(어양), 上谷(상곡), 太原(태원)
- 121년 한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廣陽(광양), 漁陽(어양), 右北平(우북평),  (탁), 遼隊(요대), 新昌(신창)
- 146년 한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

㉡ 삼국지(三國志)

- 121년 전투지역을 요동(遼東)
- 146년 전투지역을 신안(新安), 사안평(西安平)
- 242년 (정시 : 政始 3년) 궁구서안평(宮寇西安平)

㉢ 위서(魏書 : 북사)
- 黃金出自夫餘珂則涉羅所産今夫餘爲勿古所逐涉羅百濟所幷
- 황금출자부여가칙섭라소산금부여위물고소축섭라백제소병

㉣ 송서(宋書 : 南齊西 : 남제서)
- 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驪王
- 영평이주제군사정동대장군고구려왕


㉤ 양서(梁書)
- 寶立以句驪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
- 보립이구려왕안위평주목봉요동대방이국왕


㉥ 구당서(舊唐書)
- 당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후황성, 은성, 건안, 안시, 박작성, 신성(后黃城, 銀城, 建安, 安市,泊灼城, 新城)

㉦옛 군(郡)의 거리 측정 기록

- 동평군 수장현(東平郡壽張縣 : 치우천자능)과 산양군거야현(山陽郡鉅野縣 : 치우 천자의 부인 견비능 : 蚩尤肩 능)은 모두 산동성에 있으며 거리는 약 80KM이내로 본다.

퍼온글 원본 : 역사 기록상의 고구려 영토[liberum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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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관하여..

고양이와여자는매질을하지않으면살이오른다-일본격언-


이세상에서못된여자이상으로못된존재는없다.
그러나착한여자이상으로착한존재도없다-에우리피데스-


여자란돈을버는일은남자의일,
쓰는일은여자의일이라생각한다-쇼팬하우어-


여자의입은악담의소굴이다-몽고속담-


여자의말은잘들어도패가하고안들어도망신한다-한국속담-

암탉이울면집안이망한다-한국속담-

아내와자식을가진남자는자신의운명을저당잡힌것이다-베이컨-

여성에게남성의수면은자기만족을취한후의배신으로비치는것이다-보봐르-

남자의으뜸가는기쁨은여자의자존심을만족시키는것이지만
여자의으뜸가는기쁨은남자의자존심을해치는것이다-버나드쇼-

남자의눈물은상대방을괴롭혔다는데서나오는후회의눈물이지만
여자의눈물은충분히괴롭히지못했다는후회의눈물이다-니체-

여자셋이모이면접시가깨진다-한국-

한곳에두여자를놓으면날씨가차가워진다-세익스피어-

두여자를화해시키느니차라리전유럽을통합시키는데더쉽겠다-나폴레옹-

여자란아름다운옷을위해서라면어떠한짓도해낸다-레르몬토프-

여지이상으로정복하기어려운짐승도없다-아리스토파네스-

여자들이혼자있을때그녀들이어떻게시간을보내고있는지를남자들이보았다면
남자들은결코여자와결혼하지않을것이다-헨리-

남자는대리석같은마음을,여자는벌꿀같은마음을지니고있다-세익스피어-

이세상에서못된여자이상으로나쁜것은없다.
그리고착한여자에의해이루어진것만큼훌륭한것도없다-에우리피데스-

여자는자신의사랑을괴롭히기위해서는어떠한수단방법도가리지않는다-레르몬토프-

여자의결점을알자면그녀의여자친구앞에서그녀를칭찬해보라-프랭클린-

이세상에서가장빛나면서도망가지기쉬운것의하나는
여인의얼굴이며하나는도자기이다-스위프트-

길에서갑자기변을당할때남자는지갑을들여다보지만여자는거울을들여다본다-턴불-

제가남자로태어나지않았다는사실을기뻐합니다.
만약남자로태어났으면여자와결혼하게되었을거니깐-스타르부인-

원래아첨이란여자의몸에꼭맞는의상이다-키에르케고르-

여자는약한남자를지배하기보단강한남자에게지배받기를원하다.-히틀러-

맛있는수프를먹으려면아내를잘때려야한다-러시아-


----------네이버에서-----------------------
rharn//마른명태와여자는사흘마다때려야제철든다.
rharn//여자와접시는밖으로내돌리게되면깨진다.
kst8471//여자는남자의성배설구이다-김창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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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정직한 마음 고사 2007. 1. 12. 11:54

〖인생감오(人生感悟)〗

넓고 정직한 군자(君子)의 마음


관명(貫明)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君子)는 넓고 정직하며 소인은 늘 근심이 많다(君子坦蕩蕩,小人常慼慼).”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군자는 언제나 마음이 넓고 여유가 있지만 소인은 언제나 우울해하고 근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성(心性)의 높낮이가 한 사람의 내심세계의 용량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성이 넓고 여유가 있는 사상경지에 도달하려면 곧 자신의 품행과 덕을 잘 닦고 인간세상의 명리와 득실을 담담히 하고 평상시 조용하고 상서로운 심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사상경지만이 오해를 받거나 악담, 중상을 당할 때도 담담하게 대할 수 있으며 원망이나 미움이 없을 수 있다.


속담에 “사람이 마음에 꺼리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문을 두드려도 두렵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군자(君子)는 마음이 넓고 정직하며 소인(小人)은 항상 근심걱정이 많으며 자그마한 일에 맴돌고 이해득실을 따진다. 때문에 우울하고 상심해한다. 내가 일본에 유학할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탄산(坦山)은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에 도를 닦던 고승이다. 어느 날 그가 다른 승려와 함께 외출하는데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에서 한 예쁜 처녀가 진흙탕 길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원래 그녀는 기모노가 더러워질까 두려워 진탕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탄산은 이 상황을 보고 그녀의 동의를 얻어 그녀를 안고 그 진탕 길을 건넜다. 탄산과 같이 가던 승려는 몹시 반감을 가지고 반나절이나 한마디 말도 없이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을 띠고 있었다. 밤에 자려고 할 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탄산에게 물었다. “사형, 계율에 따르면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여색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수행이 위험합니다. 나는 정말로 사형이 왜 대낮에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탄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 여자를 말하는가? 나는 벌써 그녀를 내려놓았는데 자네 마음속에는 아직도 갖고 있었는가!”


이 간단한 일화와 기지 넘친 대답 속에서 탄산이 넓고 담담한 흉금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계율 때문에 피하거나 멀리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일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이 세인을 구제하고 도왔다고 기뻐한 것이 아니며 또 계율 때문에 겁을 먹은 것도 아니다. 그의 의연하면서도 자유자재하고 근심과 걱정 없는 즐거운 심정은 그의 수행이 이미 ‘담담한(坦蕩蕩)’ 정신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사를 물이 흐르듯 담담하게 처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매 사람마다 불성과 마성의 일면이 모두 있는바 수련을 해야만 마성을 제거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하는 것은 전부 맞는다고 여기며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남을 탓한다. 종래로 자신의 잘못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늘 번뇌가 끊이지 않고 하늘을 원망하고 다름 사람을 탓하며 늘 즐겁지 못하다. 인간 세상에는 오직 진정한 수련인만이 흉금이 담담하고 근심걱정과 원한과 원망도 없을 수 있다. 그러한 경지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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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도 팔자 고사 2007. 1. 12. 11:48

〖고사성어〗

걱정도 팔자(庸人自擾)


작가:홍의(弘毅)


용인자요(庸人自擾)라는 말은 없는 걱정도 사서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용렬한 사람이 없는 일을 만들어 스스로 시끄러움을 찾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당서(新唐書) 육상선전(陸象先傳)》에서 내원한 고사성어로 천하에 본래 아무 일도 없음에도 용렬한 사람이 스스로 문제(걱정거리)를 만들어 번거롭게 한다는 것이다.


당나라 예종(睿宗) 때의 일이다. 조정에 감찰어사(監察御使) 육상선(陸象先)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학식이 높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과감히 직언하여 황제가 아주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황제를 노하게 하여 관직을 강등당해 익주(益州) 대도독부 장사(長史) 겸 검남도(劍南道) 안찰사로 파견되었다.


육상선은 부임한 후에 백성들에게 아주 관대하고 인자하게 대했다. 죄를 범한 사람도 경솔하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의 조수가 권하기를 “이곳 백성들은 아주 우매하고 완고하여 관리하고 교육하기가 힘듭니다. 마땅히 엄격한 형벌을 내려 자신의 위망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육상선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내 생각은 자네와는 전혀 다르네. 백성의 일은 다스리기에 달린 것으로 자네가 잘 다스리면 사회는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에 그들이 자네에게 복종할 것이다. 왜 굳이 엄격한 형벌로 자신의 위망을 세우려 하는가?”


이에 육상선은 자신의 방식으로 익주를 다스렸다. 한번은 한 하급 관리가 죄를 범하자 육상선은 그를 한 번 훈계한 다음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너무 가볍게 처리했다고 하면서 마땅히 곤장을 쳐야한다고 하자 육상선은 엄숙하게 말했다. “사람은 모두 감정이 있는 것이다. 매 사람의 감정은 모두 비슷하다. 내가 그를 나무랐는데 설마 그가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자네들의 부하이니 그가 죄를 범했다면 자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꼭 형벌을 가해야 한다면 반드시 자네부터 시작해야하지 않겠는가?”


그 부하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무안해져서 돌아갔다.

옛사람들이 배움을 추구한 것은 사람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사람들이 배움을 추구하는 것은 벼슬을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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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룽 (许容)은 중국청나라(1636-1912) 저장성 사람으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매우 겸손하고 관대하여 자신의 재주를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한 번은 성급의 1차 고시에서 글짓기 시험을 보았는데, 쉬룽의 친구 한 사람이 쉬룽에게서 훔친 문장 한 편으로 일등을 차지했다. 그의 친구는 쉬룽의 문장을 이용해서 국가급 고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지만, 쉬룽은 합격하지 못했다. 그의 친구는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쉬룽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가 쉬룽의 문장으로 합격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쉬룽 앞에서 자랑을 했다. 쉬룽의 다른 많은 친구들은 그건 너무하는 짓이라 여겨 그를 야단치려 했다. 그러나 쉬룽은 도리어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그의 운명이 일등을 하게 한 것이니, 내 문장의 도움으로 합격이 되었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말하겠는데 지금부터는 그것이 내 문장이었다는 걸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그런데 그 친구가 와서 쉬룽에게 용서를 비는척하면서 좋은 문장 하나를 더 요청했다. 그래서 쉬룽은 그가 쓴 문장 중 가장 좋은 글을 주었다.


후에 이르러 그 사람은 산둥성 텅현('성'은 남북한 합한 크기이며 '현'은 '도'단위 정도크기이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쉬룽은 다시 국가급 고시를 치르려고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텅현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쉬룽은 그의 친구가 현의 우두머리가 되어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쉬룽을 보고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현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쉬룽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장으로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말할까 두려워, 현에 있는 저장성에서 온 사람들 모두 내쫓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 뒤 쉬룽은 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황제는 쉬룽의 훌륭함을 알고 산둥성의 우두머리로 임명했다. 말하자면 텅현을 포함한 산둥성 전체를 관장하는 벼슬아치가 된것이다.그 친구는 쉬룽을 상관으로 모시고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 된것이 너무도 부끄러워서(쪽팔려) 사직서를 썼다.

쉬룽은 친구의 잘못은 념두에도 두지 않고 도리어 연회장에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친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그들이 같이 지냈던 옛 이야기만 했을 뿐, 텅현의 우두머리인 그친구가 그를 이용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옛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이로 미루어 볼대 다른 사람에게 후하게 대하고, 그의 잘못과 단점에 대해 관용하며, 자신의 재주는 감추고, 절대 자랑하지 말라. 이것이 중국 전통문화가 강조하는 덕(德)이며, 또한 좋은 친구를 만드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쉬룽은 이 면에서 모범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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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엽동산(葉桐山)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라의 양곡을

발송하는 책임을 졌다. 임기가 되어 그를 대신할 사람이 왔을 때

남은 돈이 이미 3천금이나 쌓였다. 엽동산은 돈을 남겨둔체 그대로

가버렸다. 그가 떠난 후에 후임자는 돈이 남아 있으므로 관례에

따라 사람을 시켜 이 돈을 엽동산에게 보내주었다. 엽동산은 단호

히 접수하지 않고 "나는 남은 돈을 가지지 않는다.이것은 나의관례

이다"”고 말했다.

엽동산이 귀향한 후 어떤 때는 밥 먹기도 곤난할 때가 있었다.

어느 하루 동자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이를 본 엽동산

이 크게 애석해하면서 한숨을 쉬자 그의 처가 말했다.

“삼천금을 줘도 안 받던 분이 물고기 한 마리가 몇 푼이나 된다고

그러세요?" 엽동산이 듣고서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고 한다.

엽동산은 청렴하고 현명하며 어진 덕을 지닌 선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로부터 또 다른 도리를 알 수 있다. 맹자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도 제후자리

를 양보할 수는 있지만 그 만한 그릇이 못되면 작은 밥상 앞에서도

안색이 변할 수 있다."

바로 명예를 좋아하기에 명예를 위해서는 제후를 포기할 수도 있

지만 이것은 그가 정말로 이렇게 기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음식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진정으로

천승의 나라(帝侯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과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사람이 생전에 많은 선한 일을 했다. 그가 죽은 후 지옥에서 징벌

을 받게 되었다. 그가 불복하자 염라대왕은 그가 일생동안 선과

악을 행한 장부를 들고 와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한 소위

좋은 일들이라는 것이모두 ‘선’이 아니고‘이(利)’ 자가 아래에 쓰여

있었다. 원래 그는 선한마음(善心)과 선한 생각(善念)은 조금도없었

으며 그가 선행을한 진정한 동기는 자신의이익을 위해 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어 좋은 일을 하거나 아니면

몸을 닦고 덕행을 거르거나 하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은 하늘의 눈에는 역력히 나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헛된 명성이나 혹은 다른 목적을 추구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과 같다. 아울러 다른사람들의

안목에도 거짓이고 간사하며 명예만 위하는 좋지 못한 행동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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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를 소중히 여기지 않다》

곽문통(郭文通)은 경도(慶都)사람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1522년-1566

년)말년에 갈석위(碣石衛)가 총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출정

하여 도적을 토벌하는데 모두 실패하여 백성들의 인심이 불안해졌고

관병들도 전의를 상실했다. 유독 곽문통의 부대만이 군기가 엄하고

사기가 높았다.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곽문통은 성문을 크게 열고 병사

들을 성문 양쪽에 파견하여 지키고 조용히 적들을 기다렸다. 마치 태산

같이 늠름하여 위엄이 그대로 나타났다. 도적들은 오랫동안 관찰했으나

곽문통의 위덕에 겁을 먹고 결국 스스로 물러났다. 성 전체 백성들이 한

차례 겁난을 면하여 곽문통에게 몹시 감격하고 신임했다. 어떤 사람이

"이것 역시 성을 비우는 계책(空城計)으로 지혜와 용기가 크고 덕이 큰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고 감히 하지도 못하며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곽문통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3가지 일을 보배

처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하나는 벼슬(官) 두 번째는 돈이며 세 번째

는 생명(命)이다.”

주국정은 곽문통의 이 말에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아! 벼슬

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높은 선비(高士)이고, 돈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

니 청렴한 선비(淸士)이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충효(忠孝)와 큰

절개가 모두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는 성현(聖賢)과 호걸(豪傑)의

경지로 일반인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평생 세 가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런 관리는 실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중국에는 확실히 기이한 남아(男兒)들이 있으니 곽문통이야말로

사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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